Hyunoworld

수신인 없음

ADDRESSED TO NO ONE
세 번째 이야기 · 등대지기의 망각 · 잊힌 이름
수록곡 · 세 번째 이야기이 이야기의 음악은 준비 중입니다.

일지. 첫 번째 겨울.

기름 닷 말. 심지 셋. 어젯밤 바람 북서, 강함.

오늘 한 척을 보냈다. 작은 배가 얼음 사이로 남쪽으로 빠져나갔다. 불을 끄니 머릿속에 빈자리가 하나 생겼다. 누가 있었던 것 같다. 손이 따뜻했던 것 같은데, 그뿐이다. 이름을 적으려고 펜을 댔다가 자리만 비워 뒀다. ◻︎.

빈자리 생각은 그만하고 일이나 한다. 등대 일은 단순하다. 기름을 길어 나르고, 심지를 다듬고, 어두우면 켜고, 밝으면 끈다. 배가 오면 길을 가리킨다. 그게 전부다. 머리 쓸 일이 없으니 비어도 표가 안 난다.

기름이나 더 부어야겠다.

일지. 첫 번째 겨울, 조금 뒤.

탑 꼭대기는 바람이 둥글게 돈다. 유리 틈으로 들어와 불꽃을 핥는다. 불꽃이 누우면 종이를 대 막는다. 그러면 다시 선다. 밤새 그 일을 한다. 일이라기보다 같이 자지 않는 사이 같다.

낮에 누가 두고 간 장갑 한 짝을 찾았다. 선반 뒤에서. 작다. 내 손엔 안 맞는다. 그럼 누구 거냐. 한 짝뿐이라 짝을 찾을 수도 없다. 찾은들 누구 손에 맞을지도 모른다. 짝 없는 장갑은 장갑이라기도 뭣하다. 불쏘시개로 썼다. 잘 탔다.

배는 안 왔다. 장갑 태운 냄새가 한참 갔다.

일지. 첫 번째 겨울, 중간.

계단을 다시 세어 봤다. 백아흔. 어제도 백아흔이었다. 변할 리 없는데 매번 센다. 세지 않으면 손이 떨려서. 한 단 한 단에 발을 맞추면 다른 생각이 들 틈이 없다. 그게 좋다.

낮에 항아리를 닦았다. 누가 절임을 담가 줬던 것 같다. 신맛이 났었다. 누가. 항아리째 들고 와 웃었던가, 화를 냈던가. 둘 중 하난데 모르겠다. 어느 쪽이든 지금은 빈 항아리다. 빈 항아리는 닦아도 빈 항아리다. ◻︎.

오늘은 배가 한 척도 안 왔다. 닦을 게 항아리밖에 없었다.

일지. 같은 겨울, 뒤쪽.

심지를 갈았다. 낡은 건 그을음이 많다. 그을음이 끼면 유리가 흐려지고, 흐려지면 불빛이 멀리 못 간다. 그래서 매일 닦는다. 천에 재를 묻혀 둥글게 둥글게. 손에 익으면 눈을 감고도 한다.

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나면 탑을 오른다. 백아흔 계단. 세다 보면 잡생각이 없어진다. 어젯밤엔 큰 배를 보냈다. 갑판의 사람들이 등불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. 나는 흔들지 않았다. 두 손이 다른 데 쓰여서.

기름 넉 말로 줄었다. 기록할 게 없다. 내려오는 길에 노랫소리가 기억나려다 말았다. 누가 부르던 거였나. 가락만 한 토막. 곧 사라졌다. ◻︎.

일지. 그 겨울 어느 밤.

폭풍이 사흘 갔다. 사흘 내내 불을 끄지 않았다. 기름을 아끼면 누가 못 본다. 못 보면 부딪힌다. 그래서 아끼지 않았다. 사흘째 새벽에 배 둘이 줄지어 빠져나갔다. 앞 배가 뒷 배를 밧줄로 끌었다. 두 배가 사라질 때까지 봤다. 누가 누구를 끄는 일. 그런 게 나한테도 있었던 것 같다. 손 하나가 떠오른다. 무언가의 한쪽 끝을 잡고 있던 손. 그게 무엇이었는지,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. ◻︎ 의 손.

폭풍이 갰다. 갑판이 다 비었다. 두 배 다 잘 갔다. 기름 두 말 반으로 줄었다. 사흘치 값이다.

일지. 첫겨울 끝, 혹은 두 번째 시작.

가락이 또 왔다. 계단 중간에서. 입을 벌리면 잡힐 것 같아 멈춰 섰다. 두 소절쯤 따라 흥얼거렸는데 셋째 소절에서 끊겼다. 가사가 있던 자리에 ◻︎ 만 남았다. 누가 가르쳐 준 노래다. 자장가였나. 뱃노래였나. 끝을 모르니 처음부터 부를 수가 없다.

부두에서 한 척이 또 빠져나갔다. 작은 어선이었고, 노인 하나가 키를 잡았다. 불은 잘 갔다. 노래는 안 돌아왔다. 둘은 상관없는 일이다. 아마.

요즘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. 부르면 빈자리가 더 잘 들린다. 조용한 게 낫다.

기름 충분. 바람 잠잠.

일지. 두 번째 겨울.

배 수를 세는 걸 그만뒀다. 너무 많아서. 불을 세게 켤수록 멀리 가고, 멀리 갈수록 머릿속이 더 빈다. 어제는 기름통 뚜껑을 닫아 두고 계단 아래에 앉았다. 종이 세 번 울릴 때까지. 네 번째에는 통을 들었다. 손잡이가 손바닥에 박혔다.

일지를 누구한테 쓰고 있었더라. 첫 장 "보고 싶은" 다음 칸이 비어 있다. 받을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다. 펜을 들었는데 떠오르는 이름이 없다. 가슴이 잠깐 시리다. ◻︎.

매일 쓰는 건 습관이다. 받을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, 안 쓰면 손이 허전해서 쓴다. 아무에게도 안 보내는 편지를 매일 쓰는 사람. 그게 등대지기다. 안 어울리는 직업도 아니다.

오늘은 배가 안 온다. 한가하다.

일지. 두 번째 겨울, 한가운데.

식량이 떨어져 절임을 꺼냈다. 항아리 바닥에 마지막 한 줌. 신맛이 났다. 이 맛을 누가 담갔더라. 혀끝은 아는데 거기서 끝난다. 한 입 먹고 일지에 적으려다, 적을 이름이 없어 "절임 떨어짐"이라고만 썼다. 맛은 적지 않았다. 맛은 적을 수가 없다.

빈 항아리를 부두에 내놨다. 빗물이라도 받게. 낮에 배 한 척, 큰 거. 사람이 많았다. 다들 남쪽을 봤고 나는 불을 봤다. 잘 갔다. 항아리에 물이 반쯤 찼다.

심지 둘 반. 기름 석 말.

일지. 두 번째 겨울, 깊은 데.

기름을 길어 올리다 팔에 흉터를 봤다. 오래된 거다. 누가 꿰매 준 자국 같다. 서툰 바느질인데, 나는 바느질을 못 하니 내가 한 건 아니다. 그럼 누가. 손이 작았던 것 같다. ◻︎ 의 손. 그 이름을 부르려고 입을 뗐는데, 부두에서 종이 울렸다.

배가 들어왔다 나갔다. 짐배였고, 사람은 여럿이었다. 길을 가리키고, 불을 키우고, 멀어지는 걸 끝까지 봤다. 손님을 보내고 오니 흉터 생각은 식어 있었다. 다시 안 떠오른다. 떠올리려 애쓰면 추울 뿐이다. 흉터는 그냥 흉터다. 흉터에 이름이 붙어 있을 까닭이 없다.

심지 둘 반 남음.

일지. 세 번째 겨울인 듯.

거울을 깼다. 일부러는 아니다. 닦다가 떨어뜨렸다. 깨진 조각에 얼굴이 비쳤는데, 한참을 봐도 누군지 못 알아봤다. 늙은 등대지기 하나가 거기 있었다. 눈이 비어 있었다. 아는 얼굴이어야 할 텐데 남의 얼굴 같았다.

조각을 쓸어 담아 바다에 버렸다. 거울은 등대 일에 쓸모가 없다. 불을 비추는 데 필요한 건 유리지 거울이 아니다. 비추기만 하면 되지 누구를 비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. 거울이 없으니 내 얼굴 확인할 일도 없는데, 확인해서 뭐 하나. 아는 얼굴도 아닌데. 얼굴 하나 줄었다고 일지에 적을 것까진 없어 안 적었다.

저녁에 배 한 척. 무사히 남으로. 잘 갔다.

일지. 또 깊은 겨울.

계단을 오르다 절반에서 앉았다. 다리가 아니라 숫자가 헷갈려서. 아흔다섯이었나 여섯이었나. 처음부터 다시 셌다. 백아흔. 맞다. 두 번 세면 두 번 다 백아흔이다. 변하지 않는 게 하나는 있어야 오를 수 있다.

위에서 불을 켜고 아래를 보니 부두에 사람 그림자 같은 게 서 있었다. 손을 들어 뭔가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. 누군지 보려고 백아흔 계단을 거꾸로 내려갔다. 가 보니 빨래대였다. 누가 빨래를 널고 안 걷었다. 천이 얼어 사람처럼 서 있었다. 걷어다 안에 들였다. 누구 옷인지는 안 봤다. 봐도 모를 테니까.

배 한 척 보냄. 잘 갔다.

일지. 몇 번째인지 모를 겨울.

한 장을 찢었다. 왜인지는 안 적었다. 종이는 그냥 없다.

심지 둘 남음. 셋이었던 것 같은데. 하나는 어디 갔나.

지난밤 배 하나가 길을 잃고 코앞까지 왔다. 뱃머리의 사람이 나를 똑바로 보더니 무언가를 불렀다. 입 모양은 봤는데 소리는 바람이 가져갔다. 두 글자, 아니면 세 글자. 그 이상은 남지 않았다. 나는 남쪽을 가리켰다. 가라고. 배는 갔다. 잘 갔을 거다.

그게 내 이름이었다는 건 한참 뒤에 알았다. 알았을 땐 이름은 이미 ◻︎ 였다. 끝까지 안 물었다. 왜 하필 그 이름이 사라졌느냐고. 물어봐야 추울 뿐이다.

이름이 없어도 기름은 길을 수 있고 계단은 백아흔이다. 불은 이름을 묻지 않고 켜지고, 배도 이름을 묻지 않고 간다. 일에는 지장이 없다. 그 배가 무사히 간 게 내 이름 한 자보다 훨씬 큰일이다. 셈은 늘 맞는 쪽으로 둔다.

기름은 아직 있다.

일지. 이름 없는 겨울.

아침에 일지 첫 장을 펴 끝에 적던 서명을 봤다. "◻︎ 가." 누가 가, 무엇이 가. 펜을 댈 자리는 아는데 댈 글자가 없다. 손이 종이 위에서 한참 떠 있다가 내려왔다.

낮 동안 한 일은 이렇다. 기름 길음. 심지 손질. 유리 닦음. 계단 백아흔, 변동 없음. 배 한 척 보냄, 무사. 저녁 먹음. 적고 보니 사람이 한 일이 아니라 등대가 한 일 같다. 등대는 서명이 필요 없다. 등대는 매일 같은 일을 하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다. 나와 비슷하다. 닮아 가는 게 아니라 원래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.

빈칸 둘이 나란히 있다. 첫 장 위쪽과 끝쪽.

일지. 또 한 겨울.

새 일지를 폈다. 묵은 게 다 찼다. 첫 장에 날짜를 적고, 버릇대로 "보고 싶은" 까지 쓰고 멈췄다. 다음 칸은 비워 뒀다. ◻︎. 비워 두는 게 이젠 빠르다. 떠올리려 애쓰지 않으니 펜이 멈추지도 않는다.

종일 바람만 셌다. 북서, 종일 강함. 배는 오지 않았다. 안 오는 날엔 불을 더 키운다. 길을 잃은 배가 보라고. 누가 볼지는 모른다. 봐도 나는 모른다. 그래도 켠다. 켜는 게 일이니까.

심지 하나 반. 기름 두 말.

일지. 끝물 겨울.

손이 시려 펜을 두 번 떨어뜨렸다. 글씨가 떨려 어제 쓴 걸 못 읽겠다. 못 읽어도 상관없다. 읽을 사람이 정해져 있지 않다. 첫 장을 펴 보니 "보고 싶은" 아래 칸이 비어 있고, 끝 장을 펴 보니 서명 자리가 비어 있다. 가운데는 날짜와 기름과 심지와 배뿐이다. 위가 비고 아래가 비고 가운데만 차 있는데, 그 모양으로 일지는 그럭저럭 선다.

오늘 배는 한 척. 길을 잘 찾아 나갔다. 사람이 손을 흔들었는지는 안 봤다. 보면 흔들어 줘야 할 것 같아서. 두 손은 또 다른 데 쓰였다. 늘 그렇다.

기름 한 말 반. 바람 북서. 약함.

일지. 마지막 장.

불을 켰다. 오늘도 한 척을 보냈다. 잘 갔다.

이제 쓸 이름이 없다. 받을 사람도, 쓰는 사람도. 첫 장의 "보고 싶은 ◻︎"도, 끝에 적던 "◻︎ 가"도. 빈칸 둘은 똑같이 생겨 누가 누군지 모른다. 어쩌면 처음부터 같은 칸이었는지도.

상관없다. 불만 꺼지지 않으면 된다. 기름 한 말 남음. 바람 북서.

누가 이걸 읽거든, 빈칸은 그냥 두시오.